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은행들이 신용대출 한도를 줄이고 가산금리를 올리는 이유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하지만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유동성 커버리지 비율(LCR)의 상향 조정이다.
올해 3분기부터 LCR 기준이 95%에서 97.5%로 높아졌고, 내년 초에는 100%까지 상향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변화는 은행들이 더 많은 고유동성자산을 보유해야 함을 의미하며, 자연스럽게 대출 한도 축소와 가산금리 상승으로 이어진다.

**유동성 커버리지 비율(LCR)은 은행이 갑작스러운 자금 유출 상황에서도 일정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요구하는 유동성 보유 기준이다. LCR은 은행이 30일 동안 자금 유출이 발생해도 버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고유동성자산(현금, 국채, 중앙은행 예치금 등)을 보유하도록 규정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도입된 이 규제는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높이고 유동성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바젤 III에서 제정된 중요한 규제 중 하나다.**
양적완화와 LCR의 관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는 경제 안정화를 위해 양적완화(QE) 정책을 도입해 국채와 모기지담보부증권(MBS)을 대규모로 매입했다.
이 조치는 금융 시스템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장기 금리를 낮추어 경제 회복을 촉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2013년 5월, 당시 연준 의장이었던 벤 버냉키가 자산 매입 축소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시장에 큰 충격, 즉 '테이퍼 텐트럼'(긴축 발작)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가 급등하고 신흥국 통화와 주가가 급락하는 등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졌다.

시장의 큰 혼란을 경험한 후, 연준은 보유한 자산을 한꺼번에 매각하는 대신 ‘재투자 중단’ 방식을 선택했다.
이 방법은 만기가 된 국채와 MBS를 새로 사들이지 않고 그대로 두는 방식이다. 만기가 도래한 자산은 상환되며, 연준이 이를 다시 매입하지 않기 때문에 보유 자산 규모가 점차 줄어들게 된다.
이 방식은 시중에 풀린 과도한 유동성을 천천히 흡수해 시장에 갑작스러운 충격을 주지 않고 금융시장의 안정을 유지하면서도 유동성을 줄여나가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시중 은행들의 유동성 관리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연준의 자산 매입 축소는 특히 LCR(유동성 커버리지 비율) 규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LCR 규제는 은행들이 단기 유동성 위기에 대비해 충분한 고유동성자산을 보유하도록 요구하는데, 시중 유동성이 감소하면 은행들이 보유해야 하는 고유동성자산(HQLA)의 필요량도 함께 증가했다.
연준이 양적완화를 통해 대규모로 자산을 매입할 때는 시중 유동성이 풍부했기 때문에 은행들은 고유동성자산 비중을 줄이면서 대출과 같은 수익성 높은 자산에 더 많이 투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준이 자산 매입을 축소하고 시중 유동성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자, 은행들은 LCR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HQLA를 보유해야 하는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연준의 자산 매입 축소는 시중의 유동성을 감소시키며, 은행들은 갑작스러운 유동성 위기에 대비해 국채나 중앙은행 예치금 같은 고유동성자산을 추가로 확보해야 했다.
이는 은행이 대출이나 투자에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을 줄어들게 하여, 은행들이 대출 한도를 축소하거나 대출 기준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게 만들었다.
SVB 사례와 기업 예금의 유동성 위험
SVB(Silicon Valley Bank) 사태는 은행이 유동성 관리를 소홀히 할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023년 3월 발생한 이 사건에서, SVB는 유동성 커버리지 비율(LCR) 규제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형 은행과 달리 충분한 고유동성자산을 확보할 의무가 없었다.
이로 인해 SVB는 고객 예금 자금을 고유동성자산 대신 장기 채권과 같은 수익성 높은 자산에 투자하여 더 높은 수익을 추구했다.
SVB의 주요 고객은 개인이 아닌 스타트업과 중소기업 등 기업들이었으며, 이러한 기업 예금은 개인 예금과 달리 예금 규모가 크고 대규모 인출이 한 번에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의 유동성 리스크를 높이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SVB는 이러한 유동성 리스크에 대비하지 않고 기업 예금을 장기 채권에 투자했다. 장기 채권은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반면, 긴급한 자금 유출이 발생했을 때 즉시 현금화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실제로, 2023년 당시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SVB의 주요 고객이었던 스타트업과 중소기업들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벤처 캐피털 투자 시장도 위축되면서 이러한 기업들은 자금 지원을 받기 어려워졌고, 운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SVB에 예치된 예금을 대규모로 인출했다.
SVB는 이와 같은 대규모 인출을 감당하기 위해 자산을 현금화할 필요가 있었지만, 고유동성자산이 부족해 결국 장기 채권을 매각해야 했다. 문제는 금리가 상승한 상황에서 장기 채권을 매각할 경우 손실이 불가피하다는 점이었다. 결국, SVB는 손실을 감수하고 자산을 매각했지만 유동성 위기는 점점 심화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유동성 위기는 예금주들이 불안을 느끼고 예금을 인출하려는 움직임을 가속화시켰고, 이는 뱅크런으로 번졌다. 결국 SVB는 이러한 뱅크런 사태를 감당하지 못하고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기업 예금의 유동성 리스크가 얼마나 높은지 여실히 보여주며, 은행들이 유동성 관리에서 고유동성자산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 은행의 유동성 관리와 예금 변화
우리나라에서 단기 예금이나 자유 입출금식 예금 통장과 같이 쉽게 인출할 수 있는 예금은 은행의 유동성 관리에 큰 부담을 준다. 이러한 예금은 언제든지 인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은행은 유동성 리스크를 대비해 더 많은 고유동성자산을 확보해야 한다. 고객의 자금 인출 요구를 즉각적으로 충족하기 위해 현금성 자산을 충분히 보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정기 예금이나 정기 적금과 같이 만기가 일정하게 설정된 예금은 인출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아, 은행이 추가적인 고유동성자산을 적게 보유해도 된다. 이처럼 고유동성자산의 보유 수준은 예금의 유형과 인출 가능성에 따라 달라진다.
2020년 이후 주식시장 열풍으로 인해 많은 개인과 기업들이 자금을 단기 예금 형태로 예치했다가 주식이나 다른 투자처로 옮기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로 인해 6개월 미만의 단기 예금 잔액이 대폭 증가했고, 은행들은 자금이 언제든지 빠져나갈 가능성에 대비해 더 많은 고유동성자산을 쌓아야 했다.
이러한 고유동성자산의 확보는 은행의 대출 여력을 줄이며, 결과적으로 단기 예금 비중이 높을수록 은행의 대출 능력을 제한 할 수 있다.
현재 은행들이 대출을 축소하고 자본증권이나 은행채를 발행해 고유동성자산을 확보하는 이유는 금리 인하만으로는 유동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금리가 인하되면 예금자들은 낮은 금리의 장기 예금보다 단기 예금이나 자유 입출금식 예금 통장 같은 유동성이 높은 상품으로 자금을 이동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은행은 자금 유출 위험에 대비해 더 많은 고유동성자산을 보유해야 하며, 이는 대출 여력 감소로 이어지게 된다.
실제로 한국은행의 금융안정보고서(2023.12)에 따르면 금리인하게 예상되던 2023년 부터 장기예금의 만기 단기화가 시작되고 있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2023년 11월 말 기준, 예금은행의 만기 6개월 미만 정기예금 잔액은 210조6275억 원으로, 5월(168조5531억 원) 이후 6개월 연속 증가했다. 또한, 만기 6개월 이상 1년 미만 정기예금 잔액도 9월 164조1384억 원에서 11월 178조5465억 원으로 증가했다.
반면, 만기 1년 이상 2년 미만 정기예금 잔액은 9월 591조9366억 원에서 11월 579조9663억 원으로 감소해 단기 예금 잔액 증가와 대조를 보였다.
**장기 예금의 만기 단기화란 예금자들이 예금을 장기 상품이 아닌 단기 상품에 예치하는 경향이 증가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거나 금리 인하 가능성이 높아질 때 나타나며, 2023년 3분기부터 금리 인하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 것으로 보인다.**
은행들이 가계대출을 줄이고 가산금리가 증가하는 이유
은행들이 가계대출을 줄이고 가산금리가 증가하는 주된 이유는 자금 조달 여력이 부족해졌기 때문일 수 있다.
대출 재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은행들은 오히려 기존 대출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으며, 이러한 환경에서는 신용도가 낮은 차주나 사업자 대출의 한도를 대폭 축소할 수밖에 없다. 또한, 대출 연체율이 높아지면서 은행들은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더 높은 가산금리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현재 은행들이 대출을 축소하고 대출금리를 올리는 이유는 LCR 상승으로 인해 자금 조달 여력이 부족해지면서 생긴 유동성 부담 때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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